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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열왕기하 4장 32-37절 본문

새벽말씀나눔

9월 29일 열왕기하 4장 32-37절

Easywalking 2017. 9. 29. 06:36

[열왕기하 432-37]

32 엘리사가 집으로 들어가서 보니, 그 아이가 죽어 자기 침대에 뉘어 있었다.

33 엘리사가 들어가 문을 닫으니 안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한 후에,

34 침대 위로 올라가 그 아이 위에 엎드렸는데,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의 눈을 그의 눈에, 그리고 자기의 손바닥을 그의 손바닥에 서로 마주 대고 그의 위에 엎드리니 그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35 엘리사가 내려가 집 안을 한 번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올라가 그의 위에 엎드리니, 그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다.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수넴 여자를 불러와라." 하므로, 게하시가 그 여자를 불렀다. 그 여자가 들어오자, 엘리사가 말하기를 "당신 아들을 데려가시오." 하니,

37 그 여자가 들어와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하나님께 간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하며, 그에게 방을 따로 내어줄 정도로 호의를 베풀지만, 막상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뭔가를 직접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그녀를 축복하며 아들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했을 때, ‘나를 속이지 마세요하고 응답했습니다(4:16).

 

그 여인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그 여인의 마음과 달리 그 아들을 다시 데려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소원 비는 일에 시큰둥하던 이 여인이 절차와 관례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본래는 안식일이나 절기에만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게 되어 있는데, 직선거리로 34km가 넘는 길을 쉬지도 않고 나귀를 몰아서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발을 끌어안고 간곡하게 아들의 생명을 간구합니다.

 

마음 착한 여인이 감격스러운 선물과 숨막히는 고통을 번갈아가며 겪는 이 말씀속의 사건은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잔혹동화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엘리사가 소원을 빌라니까 저는 저대로 잘 삽니다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한 죄로 아들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하다니요?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여인은 풍족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사람들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잠언 30장에서 아굴이라는 사람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하고 기도합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 즉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과,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굳이 도와주실 필요 없습니다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수넴여인은 인격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신앙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잔혹동화 같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그녀에게 알리셨습니다.

수넴여인에게 뿐 아니라 그녀가 경험한 일을 전해 듣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진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제목이 없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알아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훌륭한 인격자라면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심각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간구한 적도 없는 아들을 줬다가, 다시 빼앗으셔서 이토록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하는 원망이 터져나올 것을 아시면서도 이 수넴여인, 아니 풍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을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풍족함이란 축복의 증거일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적인 죽음의 늪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을 상실한 사람이 바로 그 어떤 사람입니다.

교만해져서, 혹은 물질의 유혹에 넘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합시다.

 

 

 

 <Elisha Raising the Son of the Shunamite>

- Frederic Leighton(18301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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