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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자
31장 후반부는 하나님의 회복이 다윗왕국의 회복이나 예루살렘의 회복과 같은 외적인 차원의 회복을 넘어서신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사실상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내적인 회복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회복되는 날에 그 영토에는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함께 살게 된다고 했는데(24절), 이는 신분의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사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11장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 어린아이가 함께 어울리는 나라)와 일맥상통하는 중요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진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런 세상이 가능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
전쟁의 공포, 분단의 갈등, 상실의 아픔,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두려워하며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큰 멍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기도의 제목들은 길고 긴 기다림 끝에야 비로소 응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을 힘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1) 전쟁의 공포에 대한 예언 처녀 이스라엘이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며 춤추게 된다는 것은(4절), 하나님이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셨을 때 미리암과 처녀들이 춤추었던 사건을 기억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이기든 지든 그 남은 상처가 사람의 인생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잘못한 자녀를 매로 때리고 맞은 자국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고약을 발라주는 부모의 마음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형태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민족이나 개인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사랑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연약함은 피조물인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초월하지 못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구원자)와의 관계 단절에 있습니다. 이 죄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여호와께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백성, 믿음의 배신자가 되어 탐욕과 불의의 종으로 살던 백성은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11절). 그 심판은 때때로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하고 두려운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때” 이 말은 신앙인들이 잘 아는 말이지만, 잘 잊어버리는 말이기도 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 “하나님의 때”가 오늘 본문에서처럼 정확한 숫자까지 동반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지나간 역사를 읊조리듯이 정확하게 아귀가 맞춰진 채로 서술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때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그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간혹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떠벌이 신앙인들이 있긴 하지만, 가까이 붙어서 보면 그냥 황당한 말쟁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앞날을 알아맞히는 데에 집중된 행위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인데, 떠벌이 ..
누군가 일제강점기의 우리 민족에게 ‘일본 천황의 멍에를 메고 그들을 섬기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쳤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사람을 친일파 매국노로 규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들을 섬기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레미야의 외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판의 칼이라고 외치는 것과,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그들을 섬기라고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후자는 적극적으로 부역을 선동하는 말이 될 가능성이 크므로, 반역행위로 볼 여지가 훨씬 더 강하게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레미야를 매국노, 혹은 친바벨론 부역자라고 규정할 수..
사람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처럼 쉽지 않은 일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혹, 곁에서 보기에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크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자신도 모르게 움켜잡고 놓지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인 것 같습니다. 훌륭하던 청년이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바로 이 기득권이 아닌가 합니다. 한 사회의 기득권은 항상 단일한 세력을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층도 마찬가지로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예레미야와 직접적인 갈등을 일으킨 세력은 예루살렘의 왕권과 그것이 추구하는 노선을 보필하는 제사장과 선지자 계층이었습니다. 고관들과 지방의 장로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미가 같은 선지자들의 메시지처럼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임을 직감..
유다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스스로 해하였느니라”라는 한마디 말로 정의됩니다. 예루살렘이 우상숭배와 부정부패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는 무서운 진노와 파괴적인 저주의 언어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언서를 심판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읽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들은 대언자들이지 점쟁이들이 아닙니다. 알아맞히는 것이 그들의 본업이 아니라, 일어날 일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본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서로 분류하여 읽고 있는 15권의 책들은(3대예언서, 12소선지서) 모두 고난 가운데에서 깨우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책들입니다. 가나안 입성 이래로 이어진 긴 축복의 세월 동..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적인 언어로 아름답게 묘사하는데 비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일을 묘사합니다. 맹세에 관한 구절이 그 한 예에 속하는데, 예레미야 16장 14~15절과 23장 7~8절에 이스라엘이 앞으로는 자기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북방에서 고향 땅으로 귀향하게 하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 이후에 회복하실 새 이스라엘(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예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광주리의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해버린 후에 희망의 불씨를 간..
예레미야 23장은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입니다. 9절 이하의 말씀들은 거짓 예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렸을 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경고를 우스갯거리로 삼은 선지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들을 곰곰이 곱씹어보니 오늘 우리 시대의 말씀 선포자들을 향한 메시지인 듯도 합니다. 거짓 예언의 바탕에는 악한 세력과의 연합이라는 현실적 배경이 깔려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는 제사장처럼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왕에게 신의 뜻을 전하기도 하지만, 왕의 뜻에 맞게 신탁을 왜곡할 수도 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즉, 직업적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보다 왕의 뜻이 더 중요했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보다 왕의 뜻을 대변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
유다 왕국에서 왕은 곧 메시아입니다. 예레미야가 왕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예언자가 이른바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비판한다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이 말이 그다지 심각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종”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냥 종일 뿐이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복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개신교 교회는 이것을 회복하고자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제의 권위가 말씀의 권위를 대신해버린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면서 세워진 교회가 개신교 교회이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지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임을 천명한 것이 종교개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