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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자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 마가복음 14장 12-26절] 예수께서 유월절 저녁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심으로써 유월절과 성만찬이 서로 연결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뜻하는 바가 큽니다. 첫째는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억압, 착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둘째는 옛 계약이 파기되지 않은 채 새롭게 갱신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 연결고리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영적인 영역이나 개인적인 영역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해묵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세상의 더러운 권세들로부터 보호하고 자유케하시는 은혜가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본질적인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중..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 마가복음 14장 1-11절]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이해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무시하고 이해력을 평준화하려고 시도하게되면 강요, 세뇌, 주입식 반복교육 같은 폭력이 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달되면 반발을 낳게 됩니다. 반발하지 않더라도 상처는 남게 되어 있습니다. 옳은 가르침을 잘못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옳음을 선택하느라 다른 사람의 옳음을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옳음도 중요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어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 마태복음 23장 29절-24장 2절] 고난주간 둘째 날은 보통 논쟁과 심판의 날로 지키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들을 죽이고 “의로운 피”를 흘리게 한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신중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이 곧 악을 거부하게 하는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란 항상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그 은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켜 오는 자가 맛보게 되는 "영원의 파편"이라고 해야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죽을..
[고난주간 아침묵상 – 마태복음 11장 15-18절] ‘공감’이라는 것은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하는 것만 해도 벅차던 시대에는 무시하고 지나치던 문제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사람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분들도 있지 않을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만큼 지난 세대에게는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황혼 이혼률이 급증했고, 2018년 전체 이혼의 1/3이 황혼 이혼이었다는 기사를 생각해봅니다.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고집불통의 노인을 용납해주는 세상은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도 참고 살아야지...’라는 말에 항상 따라붙던 ‘자녀들 생각해서’라는 부사구의 효력이 끝나는 순간 위태롭던 결혼생활도 끝나는 것입니다. ‘고집불통’을 이해해주고 웃어넘겨 주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심판의 도구에 대한 심판이라는 점에서 모순된 예언으로 보일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먹는다) 하시는 분인 듯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실 때 교만하고 악한 자들을 종으로 부리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으셨을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전적 신뢰”만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무자비함과 교만에서 비롯된 불경함에 대하여 심판하신다는 말씀..
사해 남쪽 아라바 지역의 붉은 고원에 터를 잡았던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가 평탄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도 평탄하지는 못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윗 이후로 여호람 왕 때까지 유다 왕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아카바 만으로 가는 무역로 때문에 서로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았던 것처럼, 유다왕국은 에돔을 지배하고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 137편에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환호하는 에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예언자 오바댜의 책에는 예루살렘을 치는 바벨론에게 힘을 보태고, 함께 예루살렘을 노략질하는 에돔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남의 불행을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비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집도 내팽개쳐 둔 채 화마와 싸우고 있는 순간에, 불 끄러 가는 사람의 발목이나 붙잡고 늘어지는 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인가 싶어서 한숨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는 그런 식으로 더러운 욕망의 노예가 된 자들이 심심찮게 성공을 거둔다는 점입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런 부조리함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다가 체념하는 사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우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예언자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구약성경에서 모압이라는 나라의 기원은 중요한 설화적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심판’이라는 말과 거의 동시에 떠올리는 이름인 ‘소돔과 고모라’ 사건입니다(창세기 19장). 타락한 도시가 하늘에서 떨어진 불비로 멸망하는 이 사건에서, 모압은 암몬과 함께 멸망하는 도시에서 탈출한 유일한 의인 롯의 자손으로 기록됩니다. 모압은 아라비아 사막과 인접해있긴 하지만 비가 잘 내리고 땅이 비옥한 사해 남동쪽의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압으로 피난을 하였던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룻1:1)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모압이 그 심판 앞에 서게 되는 까닭은 위와 같은 배경들 때문..
예레미야서의 46장부터 51장까지는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들입니다. 이 심판들에 등장하는 나라 중에 애굽과 바벨론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고대세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작은 도시국가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비극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를 기반으로 한 신앙경전입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해석하듯,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메시지(하나님의 뜻)를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이 겪게 된 험난한 역사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 이전에 이미 이사야 같은 선지자가 세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
"살아있음에 감사" 인생의 괴로움이 너무 깊고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넘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 그 괴로움과 무거움을 내려놓게 하는 가장 좋은 길 가운데 하나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성찰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괴로워하는 바룩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동료들은 끌려가고, 왕과 고관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바벨론의 무자비한 통치 방식이 유다 왕국을 괴롭히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괴로움이 70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하고... 괴롭지 않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역시도 같은 괴로움으로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큰 기적을 꿈꾸지 말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라.’(5절) 이 깨달..